[야설] 사조영웅전 9-10화
제 9화: 새로운 시작, 운명의 만남
시간은 어느덧 곽정과 강남 육괴(장아생의 죽음으로 이제 여섯이었다)가 중원으로 떠나기로 약속한 18년 기한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형인의 마음은 이미 드넓은 중원 땅과 그곳에서 펼쳐질 새로운 기연, 그리고 황용이라는 최종 목표를 향한 뜨거운 야망으로 들끓고 있었다. 하지만 떠나기 전, 그는 몽골에서 맺은 관계들을 자신의 방식대로 정리하고, 그 여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더욱 깊이 각인시켜 둘 필요가 있었다.
매초풍과의 관계는 미묘했다. 그녀는 형인의 압도적인 힘과 치밀한 유혹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지만, 단순한 노예는 아니었다. 그녀는 형인을 죽은 진현풍을 대신할, 아니 그 이상의 강력하고 매력적인 연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형인 또한 그녀의 위험한 매력과 무공을 유용하게 여겼기에, 그녀를 완전히 버릴 생각은 없었다.
"초풍, 나는 곧 중원으로 떠나야 하오. 당신은 나보다 먼저 가서 기반을 마련하고 강호의 동태를 살피시오. 이것은 내 연인인 당신에게 맡기는 중요한 임무요."
격정적인 밤이 지나고 나른하게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매초풍에게 형인이 속삭였다. 그녀의 눈빛에 잠시 아쉬움과 불안감이 스쳤지만, 그의 말에 담긴 신뢰와 연인이라는 호칭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형인. 당신의 뜻이라면… 하지만 우리가 다시 만날 방법은?"
"우리가 정한 그 신호(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 남기는 검은 비단 조각)를 이용하면 되오. 나는 반드시 당신을 다시 찾을 것이니, 너무 염려 마시오."
형인은 그녀의 귓가에 둘만이 아는 은밀한 약속을 속삭이며, 그녀의 차갑지만 매끄러운 뺨에 입을 맞추었다. 매초풍은 그의 말과 애정 표현에 만족하며, 그의 지시에 따라 먼저 중원을 향해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녀는 형인의 연인으로서, 그의 계획을 돕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었다.
다음은 이평과의 작별이었다. 마지막 밤, 형인이 그녀의 게르를 찾았을 때,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곱게 빗은 머리, 옅지만 정성스러운 화장, 몸의 풍만한 곡선을 은근히 드러내는 고운 데릴은 그녀를 더 이상 초원의 소박한 아낙이 아닌, 원숙하고 농염한 미부(美婦)로 보이게 했다.
"곧 중원으로 떠나야 하오. 하지만 약속하겠소, 반드시 돌아와 당신을 내 곁에 둘 것이오. 그때까지 부디 그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시오."
형인의 속삭임에 이평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속삭였다.
"…기다리겠습니다, 서방님."
그날 밤, 그녀는 형인을 향한 애틋함과 이별의 아쉬움을 담아, 온 마음과 몸을 다해 그를 봉사했다. 그녀는 그의 발치 아래 무릎 꿇고, 경건하기까지 한 손길로 그의 단단하게 솟아오른 중심부를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존경과 깊은 갈망이 뒤섞인 눈빛으로 그것을 자신의 뜨겁고 부드러운 입안에 담았다. 지난 시간 동안 형인에게 길들여진 그녀의 혀와 입술은 이제 그의 모든 민감한 부분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를 극한의 쾌락으로 몰아넣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형인이 그녀의 입안 깊숙이 뜨거운 정수를 쏟아낼 때까지,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받아내고 삼켰다. 그것은 그녀가 그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깊은 애정이자 복종의 증표였다. 형인은 그런 그녀의 헌신적인 모습에 만족하며, 그녀의 영혼 깊숙이 자신의 낙인을 새겨 넣었다.
화쟁 공주와의 이별은 좀 더 풋풋하고 격정적이었다. 형인이 중원으로 떠난다는 소식에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슬퍼했다. 형인은 주변의 시선을 피해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슬픔을 달래주었다.
"공주님, 너무 슬퍼 마세요. 중원의 일을 마치고 꼭 돌아오겠습니다."
"거짓말! 중원에 가면 나보다 예쁜 여자들이 많다는데… 나를 잊을 거지!"
토라진 듯 입술을 내민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형인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다.
"읍…!"
화쟁은 깜짝 놀랐지만, 형인의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하고 능숙한 키스에 저항할 수 없었다. 처음 느껴보는 짜릿한 감각에 숨 막히는 흥분을 느끼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키스에 서툴게 호응했다. 한참 후 입술을 뗀 형인이 그녀의 붉어진 뺨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내 마음속엔 오직 공주님뿐이니, 걱정 말고 기다려 주세요."
"…흥! 정말이지? 중원에 가서 다른 여자 만나기만 해봐!"
화쟁은 여전히 볼을 부풀리면서도, 방금 전의 키스로 인한 묘한 흥분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아쉬움 속에 형인을 떠나보냈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이미 형인이라는 남자가 깊이 새겨져 있었다.
마침내 떠나는 날 아침, 강남 육괴는 곽정과 형인에게 각자의 길을 갈 것을 권하며 마지막 당부를 했다.
"곽정, 형인아. 이제 너희도 다 컸으니 스스로의 힘으로 강호를 헤쳐나가야 한다. 너무 우리에게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진정한 협객으로 성장하거라."
가진악의 엄숙한 말과 함께, 두 젊은이는 각각 칭기즈 칸에게 하사받은 자신의 홍마(紅馬)에 올라 정든 몽골 초원을 뒤로하고 남쪽을 향해 힘차게 말을 달렸다. 곽정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을 안고 있었고, 형인은 새로운 사냥터를 향한 기대와 야망으로 가슴이 뜨거웠다.
며칠을 달려 그들이 장가구(張家口) 근처의 번화한 객잔에 도착했을 때였다. 말에서 내려 객잔으로 들어서려는데, 입구에서 점소이와 실랑이를 벌이는 허름한 차림의 소년이 눈에 띄었다. 소년은 음식을 주문하려 했지만, 점소이는 그의 남루한 행색을 보고는 거지 취급하며 문전박대를 하고 있었다.
"어허, 점소이. 손님을 그리 박대해서야 쓰나?"
형인이 점소이를 막아서며 위엄 있게 말했다. 곽정은 옆에서 안절부절못했지만, 형인은 이미 그 소년의 정체를 간파하고 있었다. 얼굴에 검댕을 묻히고 옷은 다 해졌지만, 그 속에서 빛나는 영민한 눈빛과 숨길 수 없는 고귀한 기품. 틀림없는 황용이었다!
"이 소형제(小兄弟)는 나와 일행일세. 어서 가장 좋은 자리를 내고, 이 집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와 좋은 술을 푸짐하게 차려오게. 음식값은 내가 낼 것이니 염려 말고."
형인이 은자 몇 닢을 던져주자, 점소이의 태도는 금세 굽실거리며 공손해졌다. 황용은 갑작스러운 형인의 호의와 '소형제'라는 호칭에 놀라면서도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그를 빤히 쏘아보았다. 하지만 형인은 그런 그녀의 눈빛을 태연하게 받아넘기며, 가장 좋은 창가 자리로 그녀를 안내했다.
"자, 소형제. 앉으시게. 시장했을 텐데 많이 들게나."
곧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산해진미가 차려졌다. 황용은 평생 처음 보는 호화로운 음식들에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고 형인과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곽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두 사람은 대체 뭐지? 저 잘생긴 이는 쓸데없이 친절하고, 저 어수룩한 이는 착해 보이긴 하는데… 어쨌든 나쁜 사람들 같지는 않군.' 황용은 일단 눈앞의 음식을 즐기기로 하고, 게걸스러우면서도 어딘가 몸에 밴 우아함을 잃지 않으며 음식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형인은 그런 황용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계속해서 음식을 권하고 강호의 기이한 이야기(물론 대부분 <영웅문>에서 얻은 지식을 각색한 것이었다)를 들려주며 그녀의 흥미를 유발했다. 곽정은 옆에서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볼 뿐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객잔을 나설 때, 형인은 자신이 타고 온 홍마를 끌어와 황용에게 고삐를 내밀었다.
"소형제, 보아하니 갈 길이 바빠 보이는데, 이 말을 타고 가게. 아주 명마일세."
"네, 네 말을요?"
황용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형인을 바라보았다. 귀한 식사를 대접한 것도 모자라, 이렇게 귀하고 멋진 홍마까지 선뜻 내주다니. 이 남자의 속내는 정말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영리하게도 이 엄청난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정말… 고맙소이다. 이 은혜는 꼭 갚겠소."
황용은 날쌔게 홍마에 올라타며, 형인에게 의미심장하고 호기심 가득한 미소를 보냈다. 그리고는 "후일 강호에서 꼭 다시 봅시다!"라는 말을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곽정은 옆에서 "형인, 네 말을 주다니…"라며 당황했지만, 형인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괜찮아, 곽 형. 나는 다른 말을 구하면 그만이지. 저 소형제에게는 저 말이 더 필요해 보였네." 형인은 속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곽정이 황용의 마음을 얻었던 결정적인 두 가지 사건을 자신이 완벽하게 빼앗아 온 것이다. 이제 황용의 마음속에는 어수룩한 곽정이 아닌, 통 크고 매력적인 자신, 형인이라는 이름이 먼저 깊이 자리 잡게 될 터였다.
'황용… 너와의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형인은 북경(중도) 방향을 바라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그곳에는 비련의 미녀 목염자와 슬픈 아름다움의 포석약이 기다리고 있었다. 곽정의 운명을 하나씩 비틀고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아 자신의 하렘을 완성해 나갈 생각에, 형인의 심장은 뜨거운 야망으로 세차게 뛰고 있었다.
제 10화: 왕비의 연민, 은밀한 유혹의 시작
광활한 몽골 초원을 벗어나 남쪽으로 말을 달린 지 여러 날, 마침내 형인과 곽정은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中都)에 도착했다. 북방의 거친 풍경과는 확연히 다른, 거대하고 화려한 성곽과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가옥들, 활기차게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은 금나라의 번영을 짐작게 했다. 곽정은 휘황찬란한 도시의 모습에 촌뜨기처럼 연신 두리번거렸지만, 형인의 눈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이곳 중도에서 펼쳐질 새로운 사건들과 만나게 될 미녀들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두 사람이 저잣거리를 지나던 중, 유난히 많은 인파가 모여 웅성거리는 곳을 발견했다. 깃대에는 ‘비무초친(比武招親)’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형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원작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 그는 곽정과 함께 인파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공터 중앙에는 낡았지만 비범한 기개를 풍기는 중년 사내와 그 옆에 서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중년 사내는 양철심이 가명을 쓴 목역(穆易)이었고, 여인은 그의 수양딸 목염자(穆念慈)였다. 형인은 목염자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원작의 묘사만으로는 부족한, 청초하면서도 애처로운 아름다움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슬픔을 머금은 듯 깊고 커다란 눈망울, 오뚝한 콧날 아래 굳게 다문 붉은 입술은 보는 이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소박한 무복 차림이었지만 가녀린 허리와 봉긋 솟은 가슴의 곡선은 숨길 수 없었고,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하얀 목덜미는 형인의 소유욕을 자극했다. 그녀에게서는 아직 피지 않은 난초처럼 맑고 은은한 향기가 풍겨왔다. ‘목염자… 과연 가련미의 극치로군. 양강 따위에게 주기엔 너무 아까워.’
바로 그때, 화려한 비단 옷을 차려입은 귀공자 하나가 거만한 태도로 군중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수려한 외모였지만 눈빛에는 경박함과 오만함이 가득했다. 완안열의 아들, 완안강(完顔康). 형인은 그의 등장을 예상하고 있었다.
"이 몸이 아가씨와 한번 겨뤄 실력을 시험해 보겠소!"
완안강이 목염자를 향해 경박하게 외치며 나섰다. 그의 눈빛에는 목염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과 함께 그녀를 장난감처럼 여기는 듯한 무례함이 서려 있었다. 그가 막 목염자와 비무를 시작하려 할 때, 형인이 앞으로 나서며 그를 제지했다.
"잠깐!"
형인의 맑고 단호한 목소리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완안강 역시 불쾌한 표정으로 형인을 돌아보았다.
"그대는 보아하니 신분이 높은 공자 같은데, 비무초친의 의미를 알고 있소? 무예를 겨뤄 이기면 저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해야 하는 것이 도리일진대,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어찌 함부로 나서서 아가씨의 명예를 더럽히려 하는가!"
형인의 정론에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염자는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변호해 주는 형인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그의 수려한 외모와 당당한 태도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완안강은 자신의 체면이 깎였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이 소왕야에게 무례를 범하느냐! 네놈이 정녕 죽고 싶은 게로구나!"
분노한 완안강이 형인을 향해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형인은 예상했다는 듯 침착하게 그의 공격을 받아넘겼다. 목염자는 자신 때문에 싸움에 휘말린 형인이 다칠까 봐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의 까맣고 커다란 눈망울에는 형인에 대한 고마움과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의 격투가 시작되었다. 형인의 무공은 이미 완안강을 훨씬 능가했지만, 그는 일부러 실력을 숨기고 완안강과 호각을 다투는 것처럼 연출했다. 때로는 완안강의 매서운 공격에 밀려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교묘하게 피하거나 막아내며 승부를 내주지 않았다. 완안강은 자신의 무공이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좀처럼 승기를 잡지 못하자, 점차 초조해지고 의아함을 느꼈다.
‘이 녀석, 보기보다 제법이군. 하지만 내 상대가 될 수는 없지!’
완안강이 회심의 일격을 날리는 순간, 형인은 일부러 그 공격을 완전히 피하지 않고 가슴으로 받아냈다. 물론 내공으로 충격을 상당 부분 흡수했지만, 그는 마치 큰 내상을 입은 것처럼 ‘커헉!’하는 소리와 함께 피(미리 입안에 물고 있던 동물의 피였다)를 한 모금 토하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흥! 별것 아니로군."
완안강은 손쉽게 상대를 쓰러뜨렸다고 생각하자 금세 흥미를 잃고 돌아서려 했다. 바로 그때, 화려한 가마 한 채가 군중을 헤치고 나타났다. 가마에서 내린 것은 고운 비단옷을 입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그녀는 금나라 조왕(趙王) 완안열의 왕비, 포석약(包惜弱)이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초지종을 듣고는,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형인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가엾게도… 젊은이가 의협심으로 나섰다가 변을 당했구나. 여봐라, 저 청년을 부축하여 왕부(王府)로 데려가 의원에게 보이도록 하라."
포석약의 부드러우면서도 위엄 있는 명령에 하인들이 달려들어 형인을 부축했다. 목염자는 다친 형인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지만, 감히 왕비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한편, 이 모든 혼란 속에서 황용은 구경꾼들 틈에 끼어 있다가 삼두교(三頭蛟) 후통해(候通海)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장난기가 발동하여 그를 놀려댔다. 잔뜩 화가 난 후통해가 황용을 쫓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곽정은 ‘저 어린 거지 소년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황급히 그 뒤를 쫓아갔다. 이렇게 곽정은 형인과 자연스럽게 떨어지게 되었다.
형인은 하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조왕부로 옮겨졌다. 그는 포석약이 머무는 한적하고 조용한 별채 근처의 손님용 거처에 눕혀졌다. 포석약은 직접 의원을 불러 형인의 상태를 살피게 했다. 형인은 자신의 내공을 교묘하게 조절하여 맥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처럼 보이도록 연기했다. 경험 많은 의원조차 그의 '상태'에 혀를 내두르며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포석약은 젊은 청년이 자신의 아들 때문에 다쳤다는 죄책감과 연민으로, 자주 형인의 거처를 찾아와 그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는 본래 마음이 여리고 정이 많은 여인이었다. 남편 완안열과의 관계에서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과 슬픔을 안고 살아가던 그녀에게, 잘생기고 의협심 강한 젊은 청년의 존재는 미묘한 파문을 일으켰다.
형인은 그런 그녀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은밀한 유혹의 그물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는 포석약이 찾아올 때면 가끔 정신을 잃은 척하거나, 혹은 '더워서 그렇다'는 핑계로 상의를 벗고 얇은 이불만 덮은 채 누워 있었다. 오랜 내공 수련으로 다져진 그의 탄탄한 가슴과 복근, 넓은 어깨는 이불 사이로 은근하게 노출되어, 포석약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몰래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미간을 찌푸리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거나 잠꼬대를 하는 연기를 했다.
포석약은 처음에는 당황하여 시선을 피했지만, 자꾸만 그의 젊고 건강한 육체에 눈길이 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남편 완안열에게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젊은 남성에게서 풍겨 나오는 강렬한 생명력과 매력에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끌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형인을 만나러 가기 전에 자신도 모르게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고, 평소보다 더 고운 옷을 골라 입고 옅은 화장을 했다.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여인으로서의 욕망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자신이 형인이라는 젊고 매력적인 덫에 걸려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점점 더 깊이 그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쉬어가는 챕터입니다.
시간은 어느덧 곽정과 강남 육괴(장아생의 죽음으로 이제 여섯이었다)가 중원으로 떠나기로 약속한 18년 기한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형인의 마음은 이미 드넓은 중원 땅과 그곳에서 펼쳐질 새로운 기연, 그리고 황용이라는 최종 목표를 향한 뜨거운 야망으로 들끓고 있었다. 하지만 떠나기 전, 그는 몽골에서 맺은 관계들을 자신의 방식대로 정리하고, 그 여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더욱 깊이 각인시켜 둘 필요가 있었다.
매초풍과의 관계는 미묘했다. 그녀는 형인의 압도적인 힘과 치밀한 유혹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지만, 단순한 노예는 아니었다. 그녀는 형인을 죽은 진현풍을 대신할, 아니 그 이상의 강력하고 매력적인 연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형인 또한 그녀의 위험한 매력과 무공을 유용하게 여겼기에, 그녀를 완전히 버릴 생각은 없었다.
"초풍, 나는 곧 중원으로 떠나야 하오. 당신은 나보다 먼저 가서 기반을 마련하고 강호의 동태를 살피시오. 이것은 내 연인인 당신에게 맡기는 중요한 임무요."
격정적인 밤이 지나고 나른하게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매초풍에게 형인이 속삭였다. 그녀의 눈빛에 잠시 아쉬움과 불안감이 스쳤지만, 그의 말에 담긴 신뢰와 연인이라는 호칭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형인. 당신의 뜻이라면… 하지만 우리가 다시 만날 방법은?"
"우리가 정한 그 신호(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 남기는 검은 비단 조각)를 이용하면 되오. 나는 반드시 당신을 다시 찾을 것이니, 너무 염려 마시오."
형인은 그녀의 귓가에 둘만이 아는 은밀한 약속을 속삭이며, 그녀의 차갑지만 매끄러운 뺨에 입을 맞추었다. 매초풍은 그의 말과 애정 표현에 만족하며, 그의 지시에 따라 먼저 중원을 향해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녀는 형인의 연인으로서, 그의 계획을 돕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었다.
다음은 이평과의 작별이었다. 마지막 밤, 형인이 그녀의 게르를 찾았을 때,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곱게 빗은 머리, 옅지만 정성스러운 화장, 몸의 풍만한 곡선을 은근히 드러내는 고운 데릴은 그녀를 더 이상 초원의 소박한 아낙이 아닌, 원숙하고 농염한 미부(美婦)로 보이게 했다.
"곧 중원으로 떠나야 하오. 하지만 약속하겠소, 반드시 돌아와 당신을 내 곁에 둘 것이오. 그때까지 부디 그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시오."
형인의 속삭임에 이평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속삭였다.
"…기다리겠습니다, 서방님."
그날 밤, 그녀는 형인을 향한 애틋함과 이별의 아쉬움을 담아, 온 마음과 몸을 다해 그를 봉사했다. 그녀는 그의 발치 아래 무릎 꿇고, 경건하기까지 한 손길로 그의 단단하게 솟아오른 중심부를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존경과 깊은 갈망이 뒤섞인 눈빛으로 그것을 자신의 뜨겁고 부드러운 입안에 담았다. 지난 시간 동안 형인에게 길들여진 그녀의 혀와 입술은 이제 그의 모든 민감한 부분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를 극한의 쾌락으로 몰아넣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형인이 그녀의 입안 깊숙이 뜨거운 정수를 쏟아낼 때까지,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받아내고 삼켰다. 그것은 그녀가 그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깊은 애정이자 복종의 증표였다. 형인은 그런 그녀의 헌신적인 모습에 만족하며, 그녀의 영혼 깊숙이 자신의 낙인을 새겨 넣었다.
화쟁 공주와의 이별은 좀 더 풋풋하고 격정적이었다. 형인이 중원으로 떠난다는 소식에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슬퍼했다. 형인은 주변의 시선을 피해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슬픔을 달래주었다.
"공주님, 너무 슬퍼 마세요. 중원의 일을 마치고 꼭 돌아오겠습니다."
"거짓말! 중원에 가면 나보다 예쁜 여자들이 많다는데… 나를 잊을 거지!"
토라진 듯 입술을 내민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형인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다.
"읍…!"
화쟁은 깜짝 놀랐지만, 형인의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하고 능숙한 키스에 저항할 수 없었다. 처음 느껴보는 짜릿한 감각에 숨 막히는 흥분을 느끼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키스에 서툴게 호응했다. 한참 후 입술을 뗀 형인이 그녀의 붉어진 뺨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내 마음속엔 오직 공주님뿐이니, 걱정 말고 기다려 주세요."
"…흥! 정말이지? 중원에 가서 다른 여자 만나기만 해봐!"
화쟁은 여전히 볼을 부풀리면서도, 방금 전의 키스로 인한 묘한 흥분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아쉬움 속에 형인을 떠나보냈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이미 형인이라는 남자가 깊이 새겨져 있었다.
마침내 떠나는 날 아침, 강남 육괴는 곽정과 형인에게 각자의 길을 갈 것을 권하며 마지막 당부를 했다.
"곽정, 형인아. 이제 너희도 다 컸으니 스스로의 힘으로 강호를 헤쳐나가야 한다. 너무 우리에게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진정한 협객으로 성장하거라."
가진악의 엄숙한 말과 함께, 두 젊은이는 각각 칭기즈 칸에게 하사받은 자신의 홍마(紅馬)에 올라 정든 몽골 초원을 뒤로하고 남쪽을 향해 힘차게 말을 달렸다. 곽정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을 안고 있었고, 형인은 새로운 사냥터를 향한 기대와 야망으로 가슴이 뜨거웠다.
며칠을 달려 그들이 장가구(張家口) 근처의 번화한 객잔에 도착했을 때였다. 말에서 내려 객잔으로 들어서려는데, 입구에서 점소이와 실랑이를 벌이는 허름한 차림의 소년이 눈에 띄었다. 소년은 음식을 주문하려 했지만, 점소이는 그의 남루한 행색을 보고는 거지 취급하며 문전박대를 하고 있었다.
"어허, 점소이. 손님을 그리 박대해서야 쓰나?"
형인이 점소이를 막아서며 위엄 있게 말했다. 곽정은 옆에서 안절부절못했지만, 형인은 이미 그 소년의 정체를 간파하고 있었다. 얼굴에 검댕을 묻히고 옷은 다 해졌지만, 그 속에서 빛나는 영민한 눈빛과 숨길 수 없는 고귀한 기품. 틀림없는 황용이었다!
"이 소형제(小兄弟)는 나와 일행일세. 어서 가장 좋은 자리를 내고, 이 집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와 좋은 술을 푸짐하게 차려오게. 음식값은 내가 낼 것이니 염려 말고."
형인이 은자 몇 닢을 던져주자, 점소이의 태도는 금세 굽실거리며 공손해졌다. 황용은 갑작스러운 형인의 호의와 '소형제'라는 호칭에 놀라면서도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그를 빤히 쏘아보았다. 하지만 형인은 그런 그녀의 눈빛을 태연하게 받아넘기며, 가장 좋은 창가 자리로 그녀를 안내했다.
"자, 소형제. 앉으시게. 시장했을 텐데 많이 들게나."
곧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산해진미가 차려졌다. 황용은 평생 처음 보는 호화로운 음식들에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고 형인과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곽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두 사람은 대체 뭐지? 저 잘생긴 이는 쓸데없이 친절하고, 저 어수룩한 이는 착해 보이긴 하는데… 어쨌든 나쁜 사람들 같지는 않군.' 황용은 일단 눈앞의 음식을 즐기기로 하고, 게걸스러우면서도 어딘가 몸에 밴 우아함을 잃지 않으며 음식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형인은 그런 황용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계속해서 음식을 권하고 강호의 기이한 이야기(물론 대부분 <영웅문>에서 얻은 지식을 각색한 것이었다)를 들려주며 그녀의 흥미를 유발했다. 곽정은 옆에서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볼 뿐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객잔을 나설 때, 형인은 자신이 타고 온 홍마를 끌어와 황용에게 고삐를 내밀었다.
"소형제, 보아하니 갈 길이 바빠 보이는데, 이 말을 타고 가게. 아주 명마일세."
"네, 네 말을요?"
황용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형인을 바라보았다. 귀한 식사를 대접한 것도 모자라, 이렇게 귀하고 멋진 홍마까지 선뜻 내주다니. 이 남자의 속내는 정말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영리하게도 이 엄청난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정말… 고맙소이다. 이 은혜는 꼭 갚겠소."
황용은 날쌔게 홍마에 올라타며, 형인에게 의미심장하고 호기심 가득한 미소를 보냈다. 그리고는 "후일 강호에서 꼭 다시 봅시다!"라는 말을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곽정은 옆에서 "형인, 네 말을 주다니…"라며 당황했지만, 형인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괜찮아, 곽 형. 나는 다른 말을 구하면 그만이지. 저 소형제에게는 저 말이 더 필요해 보였네." 형인은 속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곽정이 황용의 마음을 얻었던 결정적인 두 가지 사건을 자신이 완벽하게 빼앗아 온 것이다. 이제 황용의 마음속에는 어수룩한 곽정이 아닌, 통 크고 매력적인 자신, 형인이라는 이름이 먼저 깊이 자리 잡게 될 터였다.
'황용… 너와의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형인은 북경(중도) 방향을 바라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그곳에는 비련의 미녀 목염자와 슬픈 아름다움의 포석약이 기다리고 있었다. 곽정의 운명을 하나씩 비틀고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아 자신의 하렘을 완성해 나갈 생각에, 형인의 심장은 뜨거운 야망으로 세차게 뛰고 있었다.
제 10화: 왕비의 연민, 은밀한 유혹의 시작
광활한 몽골 초원을 벗어나 남쪽으로 말을 달린 지 여러 날, 마침내 형인과 곽정은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中都)에 도착했다. 북방의 거친 풍경과는 확연히 다른, 거대하고 화려한 성곽과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가옥들, 활기차게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은 금나라의 번영을 짐작게 했다. 곽정은 휘황찬란한 도시의 모습에 촌뜨기처럼 연신 두리번거렸지만, 형인의 눈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이곳 중도에서 펼쳐질 새로운 사건들과 만나게 될 미녀들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두 사람이 저잣거리를 지나던 중, 유난히 많은 인파가 모여 웅성거리는 곳을 발견했다. 깃대에는 ‘비무초친(比武招親)’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형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원작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 그는 곽정과 함께 인파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공터 중앙에는 낡았지만 비범한 기개를 풍기는 중년 사내와 그 옆에 서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중년 사내는 양철심이 가명을 쓴 목역(穆易)이었고, 여인은 그의 수양딸 목염자(穆念慈)였다. 형인은 목염자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원작의 묘사만으로는 부족한, 청초하면서도 애처로운 아름다움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슬픔을 머금은 듯 깊고 커다란 눈망울, 오뚝한 콧날 아래 굳게 다문 붉은 입술은 보는 이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소박한 무복 차림이었지만 가녀린 허리와 봉긋 솟은 가슴의 곡선은 숨길 수 없었고,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하얀 목덜미는 형인의 소유욕을 자극했다. 그녀에게서는 아직 피지 않은 난초처럼 맑고 은은한 향기가 풍겨왔다. ‘목염자… 과연 가련미의 극치로군. 양강 따위에게 주기엔 너무 아까워.’
바로 그때, 화려한 비단 옷을 차려입은 귀공자 하나가 거만한 태도로 군중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수려한 외모였지만 눈빛에는 경박함과 오만함이 가득했다. 완안열의 아들, 완안강(完顔康). 형인은 그의 등장을 예상하고 있었다.
"이 몸이 아가씨와 한번 겨뤄 실력을 시험해 보겠소!"
완안강이 목염자를 향해 경박하게 외치며 나섰다. 그의 눈빛에는 목염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과 함께 그녀를 장난감처럼 여기는 듯한 무례함이 서려 있었다. 그가 막 목염자와 비무를 시작하려 할 때, 형인이 앞으로 나서며 그를 제지했다.
"잠깐!"
형인의 맑고 단호한 목소리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완안강 역시 불쾌한 표정으로 형인을 돌아보았다.
"그대는 보아하니 신분이 높은 공자 같은데, 비무초친의 의미를 알고 있소? 무예를 겨뤄 이기면 저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해야 하는 것이 도리일진대,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어찌 함부로 나서서 아가씨의 명예를 더럽히려 하는가!"
형인의 정론에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염자는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변호해 주는 형인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그의 수려한 외모와 당당한 태도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완안강은 자신의 체면이 깎였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이 소왕야에게 무례를 범하느냐! 네놈이 정녕 죽고 싶은 게로구나!"
분노한 완안강이 형인을 향해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형인은 예상했다는 듯 침착하게 그의 공격을 받아넘겼다. 목염자는 자신 때문에 싸움에 휘말린 형인이 다칠까 봐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의 까맣고 커다란 눈망울에는 형인에 대한 고마움과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의 격투가 시작되었다. 형인의 무공은 이미 완안강을 훨씬 능가했지만, 그는 일부러 실력을 숨기고 완안강과 호각을 다투는 것처럼 연출했다. 때로는 완안강의 매서운 공격에 밀려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교묘하게 피하거나 막아내며 승부를 내주지 않았다. 완안강은 자신의 무공이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좀처럼 승기를 잡지 못하자, 점차 초조해지고 의아함을 느꼈다.
‘이 녀석, 보기보다 제법이군. 하지만 내 상대가 될 수는 없지!’
완안강이 회심의 일격을 날리는 순간, 형인은 일부러 그 공격을 완전히 피하지 않고 가슴으로 받아냈다. 물론 내공으로 충격을 상당 부분 흡수했지만, 그는 마치 큰 내상을 입은 것처럼 ‘커헉!’하는 소리와 함께 피(미리 입안에 물고 있던 동물의 피였다)를 한 모금 토하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흥! 별것 아니로군."
완안강은 손쉽게 상대를 쓰러뜨렸다고 생각하자 금세 흥미를 잃고 돌아서려 했다. 바로 그때, 화려한 가마 한 채가 군중을 헤치고 나타났다. 가마에서 내린 것은 고운 비단옷을 입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그녀는 금나라 조왕(趙王) 완안열의 왕비, 포석약(包惜弱)이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초지종을 듣고는,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형인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가엾게도… 젊은이가 의협심으로 나섰다가 변을 당했구나. 여봐라, 저 청년을 부축하여 왕부(王府)로 데려가 의원에게 보이도록 하라."
포석약의 부드러우면서도 위엄 있는 명령에 하인들이 달려들어 형인을 부축했다. 목염자는 다친 형인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지만, 감히 왕비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한편, 이 모든 혼란 속에서 황용은 구경꾼들 틈에 끼어 있다가 삼두교(三頭蛟) 후통해(候通海)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장난기가 발동하여 그를 놀려댔다. 잔뜩 화가 난 후통해가 황용을 쫓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곽정은 ‘저 어린 거지 소년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황급히 그 뒤를 쫓아갔다. 이렇게 곽정은 형인과 자연스럽게 떨어지게 되었다.
형인은 하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조왕부로 옮겨졌다. 그는 포석약이 머무는 한적하고 조용한 별채 근처의 손님용 거처에 눕혀졌다. 포석약은 직접 의원을 불러 형인의 상태를 살피게 했다. 형인은 자신의 내공을 교묘하게 조절하여 맥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처럼 보이도록 연기했다. 경험 많은 의원조차 그의 '상태'에 혀를 내두르며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포석약은 젊은 청년이 자신의 아들 때문에 다쳤다는 죄책감과 연민으로, 자주 형인의 거처를 찾아와 그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는 본래 마음이 여리고 정이 많은 여인이었다. 남편 완안열과의 관계에서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과 슬픔을 안고 살아가던 그녀에게, 잘생기고 의협심 강한 젊은 청년의 존재는 미묘한 파문을 일으켰다.
형인은 그런 그녀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은밀한 유혹의 그물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는 포석약이 찾아올 때면 가끔 정신을 잃은 척하거나, 혹은 '더워서 그렇다'는 핑계로 상의를 벗고 얇은 이불만 덮은 채 누워 있었다. 오랜 내공 수련으로 다져진 그의 탄탄한 가슴과 복근, 넓은 어깨는 이불 사이로 은근하게 노출되어, 포석약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몰래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미간을 찌푸리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거나 잠꼬대를 하는 연기를 했다.
포석약은 처음에는 당황하여 시선을 피했지만, 자꾸만 그의 젊고 건강한 육체에 눈길이 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남편 완안열에게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젊은 남성에게서 풍겨 나오는 강렬한 생명력과 매력에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끌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형인을 만나러 가기 전에 자신도 모르게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고, 평소보다 더 고운 옷을 골라 입고 옅은 화장을 했다.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여인으로서의 욕망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자신이 형인이라는 젊고 매력적인 덫에 걸려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점점 더 깊이 그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쉬어가는 챕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