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인연을 끊었는데 아버지가 심장에 관을 삽입 수술을 한다고 하네요.
현재는
가족, 형제, 친척, 고향 친구 등과 인연을 끊고 사업 파트너들과 사업에만 몰두 하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는 평온한 상태이며 사업도 나름 잘 굴러가고 있습니다. 여자친구도 있고 저와 함께 인생과 사업적 목표를 걸고 있는
능력 있는 COWKERS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인생에 터닝 포인트를 만들고자 22년에 미국 영주권을 도전 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이유는 34살 때의 일이었고 크고 작은 사업을 고등학교 때부터 해오면서 궁핍도 해보고
남자 나이 전성기인 31살부터 34살까지 꼴에 수입 차도 타보고 이쁜 여자도 만나보고 하면서
정신 놓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 시기에 사업 수입이 가장 많았지만 인생에 큰 회의를 느끼고
사업이란 게 정말 비범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또, 돈이라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에
환멸을 느끼고 남과 비교에 지치다가 죽는 인생보다 한국보다는 비교가 덜 하지만 인프라가 있는 곳으로
다시 터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어른으로써 유일하게 저를 사랑해줄 수 있는 이모가 있는 미국으로 가서 대학 전공과 경험을 살려
취직도 하고 휴가도 즐기고(사업하면서 휴가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사랑을 받으면서 사랑이 뭔지 알면서
나를 찾아가고 싶었습니다.
이모는 엄청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제가 26~27살에 여자친구와 미국에 가서 이모댁에 10일 있다가 왔는데
저와 여자친구가 불편할까 봐 호텔을 가든 뮤지엄을 가든 유니버셜 스튜디오를 가든 라스베가스를 가도
여자친구 몫까지 다 계산해주고 너희는 돈을 모아야지 돈을 쓰면 안된다고 열심히 살으라는 조언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서 여자친구랑 헤어졌다고 하니까 "다음에 또 멋진 여자친구를 데려오라고 또 재밌게 놀자"
이런 멘트를 할 수 있는 진정한 어른입니다. 친-외가를 통틀어 유일하게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온 사람인데
서울대 4년 장학생으로 졸업하신 분인데 자식이 없습니다. 그 밑에서(제가 온다니까 이미 집을 2층 집으로 이사하고 차도 큰 것으로 바꾸고
이불 가구도 다 사다놨을 정도니까요. 이모는 저를 사랑하며 제가 미국에 온다면 저에게 물질과 사랑 인생을 다 쏟을 사람입니다.)
제가 사랑을 받고 이모와 함께 지낸다면 나중에 좋은 친구와 좋은 아들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 꿈이 대사관 면접 실패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제 생에
저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장남인 아버지와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여 궂은 일을 도 맡아 했던 장녀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하면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가장 기억에 나는 것은 좁은 셋방에 작은 밥상이 하늘 위로 천장을 향해 날아갔고
저는 무서워서 누나와 근처 놀이터를 가서 언제 들어갈지 고민하고 심장의 두근거림은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먹는 날이면 누가 집에 와줬으면 했습니다. 아버지는 사업을 했었고 헌팅용 총이 있었으며
심지어는 그 총으로 어머니를 겨루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아마 저와 비슷한 어린 시절 경험으로 인생의 주춧돌이 잘못 세워지신
분들도 많을 겁니다. 바로 제가 그랬습니다. 친형 형도 와있는데 어머니를 폭행하고 집안의 모든 기물을 다 때려 부스고
술먹고 그 사이에서 자고 있고 저희는 무서워서 숨고 ....결국 제 초등학교 때 아버지는 바람을 피웠고 간통으로 감옥에 다녀왔습니다.
어머니는 그 시절 컴퓨터를 할 줄 모른다는 이유로 저에게 아버지 간통 건에 대한 탄원서를 쓰라고 하셨죠. 결국 어머니도 다른 남자분을 만나더라고요.
아버지가 1년 정도 감옥에 가 있는 동안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나와 누나에게는 출장에 간 것처럼 소설 한편을 쓰고 저와 누나에게
편지를 쓰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이미 다 알고 있었는데 어른들은 아이들은 얼마나 많이 알고 얼마나 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
모르나 봅니다. 큰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동안 삼촌이 사업을 맡아 하다가 삼촌도 사업의 문제로 감옥에 잠시 갔습니다....
아버지는 가족 모두에게 큰 상처를 준 것이죠...
저희 아버지는 종손으로 자랐으며 돈 한 푼 없는 시골에 시집온 친할머니는 제사가 1년에 13번인 집 구석을 견디지 못하고
자식을 버리고 도주했고, 친할아버지는 내성적인 성격이셨는데 아버지와 말 년 휴가 때 한잔 하시고는 그대로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동생 둘과 함께 고아가 되었고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이후에 아버지의 두 형제들 모두
작은 아버지는 결혼 2번(이후 모두 이혼) 고모는 2번의 이혼 후 재혼 후 남의 자식을 3명이나 키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머지는 서울에 돈 한 푼 없이 올라와
동대문 운동장에서 우유 배달도 하고 수챗구멍에 있는 쓰레기도 주워 먹고 자기의 인생을 남에게 잡혀 인생도 날리고 하며 살다가
자동차 관련 기술을 어찌어찌 배워 그 것으로 잠깐의 사업적 성공(15년 정도 하다가 망했습니다.) 을 했었지만 인생에 있어 제대 된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늘 불만만 있는 괴물이 되었습니다. 가족들에게 잘 하기 보다는 밖에서 인정 받고 싶어했고 (애정 결핍이 있는 것이지요)그래서 남에게 자주 사기를 당하고 돈도 제대로 못 받는 것이지요.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지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 때의 아버지 보다 지금의 제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이며 자기 말을 굽힐 줄 모르고 특히 가족들 앞에서 어머니에게 쌍욕(ㅆㅂ년, 개같은 년, 내가 무슨 행복이 있냐 쎅스가 있냐? 사랑이 있냐??)을 서슴없이 했습니다
저는 그 것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지요.
어머니 또한 저에게 따뜻한 말은 한 적이 없으며 그냥 사람으로 봤을 때 이기적인 부분이 많은 사람입니다. 돈에 엄청나게 민감하고 돈이면 최고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버지 때문에 인생을 날린 부분에 대해 불쌍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사업을 하면서 어린 나이에 엄청난 빠끔이 사업자들과 두뇌 전쟁을 하고 있는데
금토일 본가만 다녀오면 월화수까지 제 정신이 집안에 대한 풀리지 않는 숙제들과 답답함으로 정신병에 걸려 있는 것이지요. 저는 일부러 내려갑니다. 그래도 제가 있어야지 안 싸우니까... 여행도 제가 계획짜서 제 돈으로 같이 가보기도 하고 일부러 집 보다는 나가서 먹자고 좋은 식당도 데려가 보고 수 십년 간 그 지긋지긋한 사이를 중재해보고
쉽게 말해 별 지랄을 해도 돌아오는 건 저에 대한 원망이고 풀리지 않는 관계였습니다. 제가 여자친구랑 동거를 2년을 했는데(저는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자란 인격이 바다와도 같은 사람을 만나 5년간 연애를 하며 처음 사랑과 따뜻함을 배웠습니다.) 여자친구는 매일 집에서 전화 오고 끊이지 않게 반찬과 여자친구가 좋아하는 것들을 보내주시고
저는 20대 중반부터 혼자 서울에 돈 한 푼 없이 와서 제가 어떤 집에 사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진심으로 궁금해 하지도 않으며 어쩌다가 집에서 뭐 좀 보내 달라고 하면
그 주제로 또 부모님이 싸우게 되는 그런 집 구석에 제 집 구석이었던 것이지요. 오히려 제가 뭘 하나 주기를 바라더라고요.
부모님은 제 여자친구를 좋아했는데 아버지는 자기가 바꾸지 못한 우리 집구석을 여자친구가 밝은 에너지를 가져와 바꿔 주길 바랬습니다. 이건희 집의 며느리도 시부모님과 있으면 불편 할 텐데 어떻게 하면 편하게 해주고 사랑을 줄까 보단... 그런 멘트가 나오는 집 구석,,, 저는 결혼을 포기 했고 다시 보헤미안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후에 저는 부모님을 포기 했으며 부모님을 포기하고 보지 않았는데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기현상을 느끼며 우리는 가족이 아니었구나, 이런 것들을 다 필요 없구나
라고 느꼈고 그 이후에 마음도 편해지고 사업도 더 잘 되고 있으며 실패한 미국행으로부터 온 엄청난 좌절 감도 이제는 털어 버렸습니다.
21년도 어머니가 자궁암 판정을 받았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있는 곳보다는 더 마음 편한(본가에서 아주 먼 곳으로)먼 곳으로 가서 요양하기를 바랬습니다. 아버지는 아픈 어머니를 두고 왜 집 근처로 가지 사람 피곤하게 하냐면서 또 언성을 높혔고 어머니는 그 이후에 집을 나가기로 결심했고 드디어 30년 간 지긋지긋한 부모님의 동거가 끝이 났습니다.
가족이 암에 걸렸고 입원을 했는데 본능적으로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을 잡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어머니 옷과 소지품을 제가 다 정리해서 어머니에게 보내주고 어머니와 아버지간에 연결 된 보험과 땅 빚을 차곡차곡 정리하여 두 사람이 만나지 않아도 얽힘 없이 살 수 있게 했습니다.
아들이 부모의 헤어짐을 정리하는 것 또한 저에게는 큰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이후 1년이 흘렀고 저는 아무와도 연락을 하지 않았고 인생에 가장 큰 인연을 놓고 나니 오히려 더 밝아지고 쓸데없는 관성적 만남을 모두 끊고 만났을 때 저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
제가 꿈(사업)에 도움을 주는 사람만 만나고 운동과 글을 읽고 긁을 쓰며 정신을 집중하고 건강을 챙기고 있고 사랑이 아주 많은 미국인 여자친구와 잘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차단 하지 못했던 작은아버지에게 카톡이 와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제가 폰이 두개인데 과거의 사업 때문에 가지고 있는 사용하지 않는 폰을 충전해 놨는데 카톡 알림 메세지를 보고 말았던 것이지요.) 아버지가 심장에 관을 삽입해야 하니 바쁘더라도 병원으로 오라고요...
너무 가기가 싫습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는 무심한 격언에도 제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잡은 마음인데 그 곳에 다녀오면 다시 제 사업과 멘탈이 어떻게 흐를지 모르고 저와 함께 하고 있는 사업적 동반자들에게 큰 우를 범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부모로부터 따뜻하게 사랑을 받지 못해 제가 가지고 있는 멘탈도
단단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술을 먹지 말라고 했는데 하루에 막걸리 한통을 먹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는 남들과 다르다!! 라고 말만 하지 제가 보기엔 그냥 인생에 실패한 후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여느 패자와 다름이 없었습니다.(건설 현장을 비하하는 게 아니고 그런 사람을 비유 했습니다.) 그 술이 결국 화근이 된 것이지요.
자기 아버지를 넘지 못하고 제 친할아버지와 같은 인생을 써내려 가고 있던 것이지요. 결국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나약한 사람...
답답하네요. 여자친구에게 이 많은 내용을 영어로 말하려니 제가 영어에 능숙하지도 않고, 그 간 사람을 안 만나고 있으니 또 말할 사람도 없고
또한 남에게 제 인생을 말한다는 게 대체로 좋은 피드백이 오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푸념을 남깁니다. 나중에 제 꿈인 제 자서전을 써서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저를 설명하고 싶습니다.
모두들 오늘 하루도 행복하셨길 바랍니다.
가족, 형제, 친척, 고향 친구 등과 인연을 끊고 사업 파트너들과 사업에만 몰두 하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는 평온한 상태이며 사업도 나름 잘 굴러가고 있습니다. 여자친구도 있고 저와 함께 인생과 사업적 목표를 걸고 있는
능력 있는 COWKERS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인생에 터닝 포인트를 만들고자 22년에 미국 영주권을 도전 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이유는 34살 때의 일이었고 크고 작은 사업을 고등학교 때부터 해오면서 궁핍도 해보고
남자 나이 전성기인 31살부터 34살까지 꼴에 수입 차도 타보고 이쁜 여자도 만나보고 하면서
정신 놓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 시기에 사업 수입이 가장 많았지만 인생에 큰 회의를 느끼고
사업이란 게 정말 비범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또, 돈이라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에
환멸을 느끼고 남과 비교에 지치다가 죽는 인생보다 한국보다는 비교가 덜 하지만 인프라가 있는 곳으로
다시 터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어른으로써 유일하게 저를 사랑해줄 수 있는 이모가 있는 미국으로 가서 대학 전공과 경험을 살려
취직도 하고 휴가도 즐기고(사업하면서 휴가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사랑을 받으면서 사랑이 뭔지 알면서
나를 찾아가고 싶었습니다.
이모는 엄청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제가 26~27살에 여자친구와 미국에 가서 이모댁에 10일 있다가 왔는데
저와 여자친구가 불편할까 봐 호텔을 가든 뮤지엄을 가든 유니버셜 스튜디오를 가든 라스베가스를 가도
여자친구 몫까지 다 계산해주고 너희는 돈을 모아야지 돈을 쓰면 안된다고 열심히 살으라는 조언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서 여자친구랑 헤어졌다고 하니까 "다음에 또 멋진 여자친구를 데려오라고 또 재밌게 놀자"
이런 멘트를 할 수 있는 진정한 어른입니다. 친-외가를 통틀어 유일하게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온 사람인데
서울대 4년 장학생으로 졸업하신 분인데 자식이 없습니다. 그 밑에서(제가 온다니까 이미 집을 2층 집으로 이사하고 차도 큰 것으로 바꾸고
이불 가구도 다 사다놨을 정도니까요. 이모는 저를 사랑하며 제가 미국에 온다면 저에게 물질과 사랑 인생을 다 쏟을 사람입니다.)
제가 사랑을 받고 이모와 함께 지낸다면 나중에 좋은 친구와 좋은 아들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 꿈이 대사관 면접 실패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제 생에
저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장남인 아버지와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여 궂은 일을 도 맡아 했던 장녀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하면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가장 기억에 나는 것은 좁은 셋방에 작은 밥상이 하늘 위로 천장을 향해 날아갔고
저는 무서워서 누나와 근처 놀이터를 가서 언제 들어갈지 고민하고 심장의 두근거림은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먹는 날이면 누가 집에 와줬으면 했습니다. 아버지는 사업을 했었고 헌팅용 총이 있었으며
심지어는 그 총으로 어머니를 겨루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아마 저와 비슷한 어린 시절 경험으로 인생의 주춧돌이 잘못 세워지신
분들도 많을 겁니다. 바로 제가 그랬습니다. 친형 형도 와있는데 어머니를 폭행하고 집안의 모든 기물을 다 때려 부스고
술먹고 그 사이에서 자고 있고 저희는 무서워서 숨고 ....결국 제 초등학교 때 아버지는 바람을 피웠고 간통으로 감옥에 다녀왔습니다.
어머니는 그 시절 컴퓨터를 할 줄 모른다는 이유로 저에게 아버지 간통 건에 대한 탄원서를 쓰라고 하셨죠. 결국 어머니도 다른 남자분을 만나더라고요.
아버지가 1년 정도 감옥에 가 있는 동안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나와 누나에게는 출장에 간 것처럼 소설 한편을 쓰고 저와 누나에게
편지를 쓰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이미 다 알고 있었는데 어른들은 아이들은 얼마나 많이 알고 얼마나 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
모르나 봅니다. 큰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동안 삼촌이 사업을 맡아 하다가 삼촌도 사업의 문제로 감옥에 잠시 갔습니다....
아버지는 가족 모두에게 큰 상처를 준 것이죠...
저희 아버지는 종손으로 자랐으며 돈 한 푼 없는 시골에 시집온 친할머니는 제사가 1년에 13번인 집 구석을 견디지 못하고
자식을 버리고 도주했고, 친할아버지는 내성적인 성격이셨는데 아버지와 말 년 휴가 때 한잔 하시고는 그대로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동생 둘과 함께 고아가 되었고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이후에 아버지의 두 형제들 모두
작은 아버지는 결혼 2번(이후 모두 이혼) 고모는 2번의 이혼 후 재혼 후 남의 자식을 3명이나 키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머지는 서울에 돈 한 푼 없이 올라와
동대문 운동장에서 우유 배달도 하고 수챗구멍에 있는 쓰레기도 주워 먹고 자기의 인생을 남에게 잡혀 인생도 날리고 하며 살다가
자동차 관련 기술을 어찌어찌 배워 그 것으로 잠깐의 사업적 성공(15년 정도 하다가 망했습니다.) 을 했었지만 인생에 있어 제대 된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늘 불만만 있는 괴물이 되었습니다. 가족들에게 잘 하기 보다는 밖에서 인정 받고 싶어했고 (애정 결핍이 있는 것이지요)그래서 남에게 자주 사기를 당하고 돈도 제대로 못 받는 것이지요.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지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 때의 아버지 보다 지금의 제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이며 자기 말을 굽힐 줄 모르고 특히 가족들 앞에서 어머니에게 쌍욕(ㅆㅂ년, 개같은 년, 내가 무슨 행복이 있냐 쎅스가 있냐? 사랑이 있냐??)을 서슴없이 했습니다
저는 그 것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지요.
어머니 또한 저에게 따뜻한 말은 한 적이 없으며 그냥 사람으로 봤을 때 이기적인 부분이 많은 사람입니다. 돈에 엄청나게 민감하고 돈이면 최고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버지 때문에 인생을 날린 부분에 대해 불쌍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사업을 하면서 어린 나이에 엄청난 빠끔이 사업자들과 두뇌 전쟁을 하고 있는데
금토일 본가만 다녀오면 월화수까지 제 정신이 집안에 대한 풀리지 않는 숙제들과 답답함으로 정신병에 걸려 있는 것이지요. 저는 일부러 내려갑니다. 그래도 제가 있어야지 안 싸우니까... 여행도 제가 계획짜서 제 돈으로 같이 가보기도 하고 일부러 집 보다는 나가서 먹자고 좋은 식당도 데려가 보고 수 십년 간 그 지긋지긋한 사이를 중재해보고
쉽게 말해 별 지랄을 해도 돌아오는 건 저에 대한 원망이고 풀리지 않는 관계였습니다. 제가 여자친구랑 동거를 2년을 했는데(저는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자란 인격이 바다와도 같은 사람을 만나 5년간 연애를 하며 처음 사랑과 따뜻함을 배웠습니다.) 여자친구는 매일 집에서 전화 오고 끊이지 않게 반찬과 여자친구가 좋아하는 것들을 보내주시고
저는 20대 중반부터 혼자 서울에 돈 한 푼 없이 와서 제가 어떤 집에 사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진심으로 궁금해 하지도 않으며 어쩌다가 집에서 뭐 좀 보내 달라고 하면
그 주제로 또 부모님이 싸우게 되는 그런 집 구석에 제 집 구석이었던 것이지요. 오히려 제가 뭘 하나 주기를 바라더라고요.
부모님은 제 여자친구를 좋아했는데 아버지는 자기가 바꾸지 못한 우리 집구석을 여자친구가 밝은 에너지를 가져와 바꿔 주길 바랬습니다. 이건희 집의 며느리도 시부모님과 있으면 불편 할 텐데 어떻게 하면 편하게 해주고 사랑을 줄까 보단... 그런 멘트가 나오는 집 구석,,, 저는 결혼을 포기 했고 다시 보헤미안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후에 저는 부모님을 포기 했으며 부모님을 포기하고 보지 않았는데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기현상을 느끼며 우리는 가족이 아니었구나, 이런 것들을 다 필요 없구나
라고 느꼈고 그 이후에 마음도 편해지고 사업도 더 잘 되고 있으며 실패한 미국행으로부터 온 엄청난 좌절 감도 이제는 털어 버렸습니다.
21년도 어머니가 자궁암 판정을 받았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있는 곳보다는 더 마음 편한(본가에서 아주 먼 곳으로)먼 곳으로 가서 요양하기를 바랬습니다. 아버지는 아픈 어머니를 두고 왜 집 근처로 가지 사람 피곤하게 하냐면서 또 언성을 높혔고 어머니는 그 이후에 집을 나가기로 결심했고 드디어 30년 간 지긋지긋한 부모님의 동거가 끝이 났습니다.
가족이 암에 걸렸고 입원을 했는데 본능적으로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을 잡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어머니 옷과 소지품을 제가 다 정리해서 어머니에게 보내주고 어머니와 아버지간에 연결 된 보험과 땅 빚을 차곡차곡 정리하여 두 사람이 만나지 않아도 얽힘 없이 살 수 있게 했습니다.
아들이 부모의 헤어짐을 정리하는 것 또한 저에게는 큰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이후 1년이 흘렀고 저는 아무와도 연락을 하지 않았고 인생에 가장 큰 인연을 놓고 나니 오히려 더 밝아지고 쓸데없는 관성적 만남을 모두 끊고 만났을 때 저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
제가 꿈(사업)에 도움을 주는 사람만 만나고 운동과 글을 읽고 긁을 쓰며 정신을 집중하고 건강을 챙기고 있고 사랑이 아주 많은 미국인 여자친구와 잘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차단 하지 못했던 작은아버지에게 카톡이 와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제가 폰이 두개인데 과거의 사업 때문에 가지고 있는 사용하지 않는 폰을 충전해 놨는데 카톡 알림 메세지를 보고 말았던 것이지요.) 아버지가 심장에 관을 삽입해야 하니 바쁘더라도 병원으로 오라고요...
너무 가기가 싫습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는 무심한 격언에도 제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잡은 마음인데 그 곳에 다녀오면 다시 제 사업과 멘탈이 어떻게 흐를지 모르고 저와 함께 하고 있는 사업적 동반자들에게 큰 우를 범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부모로부터 따뜻하게 사랑을 받지 못해 제가 가지고 있는 멘탈도
단단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술을 먹지 말라고 했는데 하루에 막걸리 한통을 먹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는 남들과 다르다!! 라고 말만 하지 제가 보기엔 그냥 인생에 실패한 후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여느 패자와 다름이 없었습니다.(건설 현장을 비하하는 게 아니고 그런 사람을 비유 했습니다.) 그 술이 결국 화근이 된 것이지요.
자기 아버지를 넘지 못하고 제 친할아버지와 같은 인생을 써내려 가고 있던 것이지요. 결국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나약한 사람...
답답하네요. 여자친구에게 이 많은 내용을 영어로 말하려니 제가 영어에 능숙하지도 않고, 그 간 사람을 안 만나고 있으니 또 말할 사람도 없고
또한 남에게 제 인생을 말한다는 게 대체로 좋은 피드백이 오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푸념을 남깁니다. 나중에 제 꿈인 제 자서전을 써서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저를 설명하고 싶습니다.
모두들 오늘 하루도 행복하셨길 바랍니다.


